춘하추동-또 다른 세상

춘하추동-또 다른 세상

석두 3 3,576
그렇게 1965년 1월 26일 고교 졸업하고 한해가 갔다.
인자 모친이 이런 말씀 했었다. '너거 두키(둘이) 잘 사는걸 볼 날도 있을거고, 그러나 지금은 너무 빠르제?공부 더 해야지'
고등학교 3학년, 수업시간에 월사금 못 냈다고 교실을 좇겨 난 석두는 학교  아래 있는 인자네 집에 갑니다. 인자 모친은 큰 절 하는 나를 알아보든군요. 그리고 내가 충정을 바쳐 보낸 사춘기의 그 우스광스러운 편지 얘기 하시며 한 말씀입니다.
국민학교 때 뵙고 처음 뵙는 날이지요. 어릴 적에 도시락 인자 손에 들려 보내주셔서  그런대로 굶어죽지는 안하겟지만 등교는 할 수 있었던게 고마운지, 그 도시락 지원이 없었다면 나는 어쩌면 초등학교 중퇴이였을 수도 있었는데. 그 도시락이 없어 내가 최악의 경우까지 갔더라면? 가끔, 나는 지금도 나를 최악의 환경에 몰아 넣고 '이 돌아, 살아봐라, 하고 악 써게 만듭니다.

아주 천천히 아쉽지만 수자와 인자는 그렇게 내 주변에서 정리됩니다.
그리고 아지트에서 무작정 덤벼드는 전혀 인연 없는 남자의 대쉬를 물리친 고아원 출신 그 아가시가 내 품에 달라들어 말없이 하소연하는 그 충격으로 나는 광복동 방랑생활을 접습니다. 이 것 저것 너무 많이 보고 많이 겪었네요. 그러나 그건 경험의 아주 초짜이던데요. 
내 식구들은 집안 막내인 내가 집에 없는거 무지 익숙합니다. 입 하나 든다는 말 있지요. 집에 있으면 굶지만
바같으로 돌면 밥 한 술 얻어 먹을 수 있습니다. 그 제일 좋은 방법은 초등학교 때의 스튜디그룹에 내가 선생이 되는 겁니다.국민학교 6학년때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으니 내 학우 부모님들 내게 많은 기대 겁니다.
저거 아(자기 애) 공부 좀 잘 시켜달라고요.
중학교 1학년때 국6을 가르쳤는데, 너무 어리다고 대학생 보조가정교사 둘을 보내서 자존심 상해서(?) 그만두었습니다.
한 학년 차이인 그 제자와 같이 다마치기(구슬)하면서 공부하겠다는 내 방식이 불안했던 모양입니다.
그렇게 집 보다는 바같쪽으로 어릴 때부터 돌아다녔으니 집안 식구들은 역시 입 하나 더는 것으로 반겼답니다.
1966년, 매서운 찬 바람이 더 기승을 부리는게 부산의 2월입니다. 가끔은 따사할 수도 있습니다. 어느 날 저녁 늦은 시간에 지금 국제시장 아래 옛 전화국 근처의 다방에서 부산문우회 미우회 전시회가 있어 가 봅니다. 앞에도 언급했지만 부산시 고등학교 문예반 미술반 합동모임입니다. 거기서 돌아 나오다가 딱 마주친 소녀가 예의 고아원 출신 소녀입니다.
 무척 반가워하는데, 자주 집 나와 생활해본 내가 이 소녀의 현재를 왜 가늠 못합니까만, 나 역시 바깥에서 거의 동냥 비슷하게 살고 있을 때 만난 사이 아닙니까.
둘이 갈 때가 없습니다. 왜? 단돈 1원도 없으니까요. 그나마 다행이 지나 나나 저녁은 해결했는데, 이 소녀 잠잘 때가 없는겁니다만, 서로 그 현실은 외면하고  부산 자갈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용두산공원 벤치에 앉아 예의 캐논카메라 얘기를 그때 듣습니다. 시간은 자꾸 통행금지가 가까워지는데 내가 거기서 떠나면 30분쯤 후에 초량의 단칸방으로 걸어갈수 있습니다만, 당장 이 소녀인지 아가시인지는 어찌하느냐?
눈 딱 감고 나는 그녀를 혼자 두고 용두산 공원을 떠납니다. 15분쯤 후에 동광동 인쇄골목(그때는 없음)까지 가다가 나는 돌아섭니다. 어쩌면 어머니와 같이 잘 수도 있다. 라는 희망으로 급히 용두산공원에 가보니 그 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더이다.
내가  우리 엄마랑 자자니까, 여기 이렇게 앉아있으면 어떤 놈씨가 지를 델고 갈 기회가 있으니 그냥 놔두란다. 그래도 2월의 밤은 차고 용두산공원에 밤11시에 칼치사냥 올 남자없다며 델고 갔는데, 세상에 우리 엄마 단칸방에 누님 둘에다가 매형들까지니 잘 됐다 하고 여인숙 비 뜯어서 초량 중국인 화교 근처 여인숙에 투숙을 했었다.
그리고 그래 나도 남자 아니냐. 더군다나 이 방 값 내가 부담했으니 나 경험하게 해 다오.
이 애 여러 이유를 대면서 한사코 거절하든군요, 그래서 아쉽게  날이 샜는데
"임검입니다"
그 애는 나보다 엄청 조숙합니다. 캐논카메라 줄 때부터, 고아원에서 자랄 때부터 삶의 년륜이 더 있었는지 그 애는 성년자라고 놔두고 나만 달랑 파출소 데려갑디다. 현재의 초량2지구대인 내 엄마의 단칸방 올라가는 골목 옆에 있는 파출소에 끌려 갔는데, 순경이 우리 집을 잘 안되요. '전득마이, 내 닐 그래 안 보았는데 벌써 계집질이나 하고 다니고'
하이고 창피야, 아이고 분해라! 허긴 석두 하는짓이 노상 꺼벙아닌가.
줄 때도 못 챙겨 먹는 놈이 당해도 싸다.
훈계 좀 듣고 나오니 이 고아 출신이 기다리고 있습디다. 아침밥 사 먹을 돈은 역시 없습니다. 딱 여인숙비 130원만 누나한테 얻어 왔으니까요. 이른 오전에 갈 곳이 없어 둘은 다시 용두산공원으로 갑니다. 밤에는 몰랐는데 공원 광장에는 칸막이를 여러게 널어 놓고 반공전시회를 하고 있었디다. 둘은 거기서 알게 모르게 칸막이를 이용하여 서로 사라졌습니다.
그렇게 1966녀 봄이 옵니다.
이 글에서 시프트 눌려야 조립되는 글자가 간혹 틀리게 나오는거는 내가 고교 졸업 후 자살한답시고 손목 신경을 끊어서 지금도 왼손 새끼손가락 힘이 없어 시프트키를 확실히 못 눌린 탓입니다. 음악실에서 인자를 만날 당시 왼쪽 새끼 손가락은 돌로 내려쳐도 반응이 없을정도라  담배불에 노상 데엿답니다. 

Comments

★쑤바™★
이 글을 써 내려가시고....
아무래도 넨네와 함께 소주잔 기울이셔야 할 듯...ㅠ_ㅠ
몽이새끼는 술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디...
넨네는 술 잘 한대요?ㅋ 
mamelda
에고고..
석두선배님 몸을 아끼셈 ㅡㅡ 
명랑!
용두산 공원...언제 함 가 보나...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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